이타성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이기와 이타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진화의 틀은 그 기준을 제공한다.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취한 생존전략은 이타성. 따라서 인류는 본성적으로 이타적이다. 그러나 그 이타성은 유전자 복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적 선택의 결과. 즉, 유전자 수준에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개인수준에서는 이타적이며, 집단수준에서는 이기적. 근대 경제학의 오류는 개인을 이기적 존재라고 규정한 것.

문명

과학기술 결핍시대의 이상한 과잉

나는 문과충이란 말을 싫어한다. 이과출신이면 과학기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그릇된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과충이라 불려 마땅한 인문학자가 있다. 위험사회로 유명한 울리히 벡이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은 그의 저서(영역본) 22쪽 아래 문장에 기반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더이상 사고가 아니다. (중략). 사고의 영향은 세대를 거쳐 지속된다. 원전사고의 영향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후대 및 사고발생 지역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까지 미친다. 이는 곧 이제까지의 과학과 법률기관에 의해 확립된 위험의 계산이 붕괴됐음을 의미한다. (중략). 방사능은 인간의 지각능력을 온전하게 회피한다 (p. 22)”

벡은 동네 아저씨 수준의 주장을 멋지게 포장했을뿐이다.

벡은 자신의 주장에 핵심전제가 되는 이 엄청난 주장을 하면서도 단 한건의 학문적 성과도 인용하지 않았다. 당연히 벡의 주장에 반하는 근거는 있다. 체르노빌 생존자 200여명과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세대를 거쳐 지속되는 영향을 찾을 수 없었다.

Yeager, M., Machiela, M. J., Kothiyal, P., Dean, M., Bodelon, C., Suman, S., ... & Chanock, S. J. (2021). Lack of transgenerational effects of ionizing radiation exposure from the Chernobyl accident. Science, 372(6543), 725-729. DOI: 10.1126/science.abg2365.

더 큰 문제는 벡의 동네아저씨 수준의 논리를 지식인들(문과뿐 아니라 이과출신 포함)이 과학적 성과에 대한 검토 없이 인용한다는데 있다.

과거 사회적 위험은 방재기술이나 보건위생 등의 결핍으로 일어났다. 반면 현대의 위험은 보통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한 과잉으로 발생한다. 기후변화 등은 외부요인이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든 위험들이다. 문명으로 인해 오염된 지구는 이제 역으로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위험은 문명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일어났기에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최악의 전망에서 찾는 최선의 길[내가 만난 名문장/조천호] https://www.donga.com/.../article/all/20220425/113054572/1)

기후변화는 인류의 에너지기술 결핍의 결과이지 과잉의 결과가 아니다. 과잉은 결함투성이 기술(예: 화력발전)을 과도하게 사용하도록 한 사회적 환경과 과학기술의 성과를 외면하는(혹은 무지한) 반핵활동가들에 있다.

원자력에 제대로 투자했더라면 기후위기까지 오지 않았다.

1990년대의 벡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전학 성과가 쏟아지는 2020년대의 지식인이라면 좀 달라야 하는것 아닌가...

울리히벡 위험사회론 위험사회 과학기술

풍요주의 vs. 맬서스주의

ㅍㅍㅅㅅ가 지난 5월 뉴스페퍼민트가 번역한 피터 글릭의 글을 9월에 다시 게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