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 임종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비극이 아니라,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 그간 쌓아 놓았던 자신의 물품을 미리 정리하는 죽음청소(death cleaning)는 삶을 마무리하는 한 절차.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에서 고통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의사조력임종을 반대하는 논리 중 하나가 생명을 중단하는 처방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의료윤리라는 주장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치료도 불가능하다. 사는게 죽는것만 못한 상황이다. 고통을 끝내도록 도와주는 것과 지속하도록 방치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심신에 해를 주는 것일까. 과연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 환자의 이익에 부합할까? 말기환자의 고통을 해결해줄 능력이 없으면 그 현실을 인정하는것이 윤리적인 의료인의 자세가 아닐까?

<aside> 💡 고현종 노년 유니온 사무처장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말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안규백 의원의 조력존엄사 법안 발의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내 신념과 반대된다는 이유로 배척하기 보다는 소수가 원한다고 해도 꼭 필요하다면 존중하고 수용하는 사회로 진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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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음료의 자발적 포기를 통한 ‘자의임종’

이웃사촌의 죽음 이후 M 여사는 며칠간 깊은 사색에 잠겼다. 안부를 묻는 질문에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요양사들이 말을 걸면 그저, “이제 나도 가야 할 때가 왔어요“라는 대답만 했다. M여사는 결국 요양팀의 간절한 요청도 마다하고 모든 음식물과 음료 섭취를 중단했다. 여사는 아직 살아있는 두 자녀를 불러 자신의 결정을 알리며 이해해달라고 부탁하였고, 자녀들은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인공적으로 영양섭취를 받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했다. M여사는 날이 갈수록 더 조용해졌지만 특별히 더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2주 후 M여사는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고, 더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ㅇ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존엄사의 의미와 그 실현가능성 http://www.yes24.com/Product/Goods/23632101

조력존엄사법을 반대하는 임상의사의 거부감은 생명중단 행위를 능동적으로 하도록 하는데 있다. 자의임종은 임상의사의 곤란한 상황을 덜어줄수 있는 방법.

자의임종 상황에 관련된 사람들이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지 않게만 하면 된다.

조력사 존엄사 안락사

위 글을 보고 영양섭취 중단이 존엄한 죽음의 한 방법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죽음의 격(http://www.yes24.com/Product/Goods/111736075)'에 묘사된 아래 상황을 보니, 처방약에 의한 죽음이 더 존엄한 죽음의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1982년 스물다섯이었던 낸시 크루잔Nancy Cruzan은 그녀가 일허던 미주리주 카시지Carthage의 치즈공장에서 집으로 운전하던 중 사고를 냈다... 당시 의사는 그녀가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에 빠질 것이라며 생명 유지 장치를 달았다... 그녀의 운명은 1990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사상최초의 죽을 권리에 관한 판결이었다... 마침내 영양 공급관을 빼냈고, 낸시가 사망하기까지는 12일이 걸렸다. 보도에 따르면 낸시는 입술이 부르트고 갈라지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혀가 붓고 눈꺼풀은 닫힌 채로 말랐다. 낸시가 죽는 과정을 알게된 미국인들은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고 탈수증으로 죽도록 놔두는 것이 의사가 치명적인 주사를 놓아 삶은 빨리 끝내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묻기 시작했다. "미주리주에서는 개조차도 합법적으로 굶겨 죽일 수 없어요." 낸시의 육신이 무너지는 동안 병원 밖을 지키려고 애틀랜타에서 온 목사는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개만도 못한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곡기끊기

곡기 끊기

내 삶을 내 뜻대로 마무리하는 여러 방법중 하나

봄에는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고 가을에는 낙엽을 떨어뜨리는 것처럼